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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릴레이

그녀들, 끝내 『밝은 밤』을 품었던 사랑의 달인 인생의 고수들

  • 등록일

  • 2022-06-13

  • 등록자

  • 김*미

  • 조회수

  • 251

https://blog.naver.com/ymkim0803/222637767494

몇 년 전 우연히 단편집 『쇼코의 미소』를 읽고, 최은영 작가를 알게 되었다.

읽자마자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작가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었고, 오늘은 작년 2021년 7월에 출간한 장편소설 『밝은 밤』을 읽었다.

출간 이후 그 책에 쏟아진 언론과 출판계의 찬사를 접하면서도 읽지 않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쇼코의 미소』와 비슷한 어떤 것을 예상했었다. 비슷했지만 달랐다.

『쇼코의 미소』도 충분히 훌륭했지만,

그 여리고 선명한 감수성의 확대경으로 비추이는 사람의 이야기가

350쪽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의 장편에 이물감 없이 녹아들어 있었다.

작가는 어떤 인터뷰에서 소설을 쓸 때 계획을 정밀하게 하지 않고, 작중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고 했다.

그 점이 『밝은 밤』을 그토록 유려하고 유장하게 하는 것 같았다.

성별과 연령에 관계 없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상실, 슬픔, 어처구니 없음을 겪고 어찌할 바를 몰라 혼란스러운 사람에게.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야 겨우 살 것 같아 이 악물고 살아내는 사이 너무 무감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낌새를 조금도 알아채지도 못하게 된 사람에게. 모두 마음약이 되어 줄 것이다.

무엇보다 우주만큼 깊은 이야기를 품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얻게 될 것이다.

첫 줄부터 마음에 착착 붙는 흡인력있는 소설이었다. 그 흡인력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32세의 천문 연구원 지연의 증조 할머니인 삼천댁이라는 캐릭터 덕분이다. 총 5부로 나뉘어진 책 내용은 어떤 이는 아껴 읽느라 하루에 1부씩 읽었다고 했다. 나는 다시 볼 부분의 쪽수를 메모하며 하루 만에 읽었다. 대신 이 책에 대한 독후감만큼은 작가가 이 책을 마음을 다해 썼듯이 연서를 쓰듯 순정한 마음으로 쓰고 싶다.

『밝은 밤』을 읽으며 몇 번인가 책을 덮고 눈물을 찍어냈다. 혹독한 삶 앞에 천둥벌거숭이로 마주 선 순한 사람들이 고난을 지나가는 법.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삶이었으리라. ​

이 소설의 작중 화자는 서른 두 살의 천문 연구원이다. 몇 달 전에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한 이혼 후의 혼란으로 내면은 휘청거리면서도 새로운 도시 희령의 천문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바다를 면한 희령이라는 작은 도시는 화자에게 열 살 때 방문했던 할머니의 고장이었다. 그녀는 열 살 때의 할머니와의 추억 외엔 어떤 왕래도 없었다. 그녀의 엄마가 정상적인 결혼에 필사적으로 적응하며 살아내느라 의절에 가깝게 애써 외면했던 탓이다. 화자는 희령에서 우연히 사실 남과 다름 없는 열 살 때 한번 만났을 뿐이던 할머니를 다시 만난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한 만남을 통해 자신과 꼭 닮았다는 할머니의 엄마 삼천댁(화자의 증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증조모와 할머니의 신산한 삶과 그 삶에 한 줄기 햇살 같았던 새비 아주머니와의 우정, 명숙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화자는 회복되고 성숙한다. 등장인물 중 가장 극적인 시절을 산 가장 극적인 인물 이정선은 일제 강점기에 옥수수 장사 등 갖은 잡일을 하며 병든 어머니를 부양하면서도 꿋꿋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열 아홉 처녀이다. 반상의 법이 사라진 것은 오래되었으나 사람들의 인식 속에 백정의 딸은 여전히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다. 일본 경찰들이 정신대로 처녀들을 붙잡아가는 공포스런 분위기에서 이웃에 사는 소년은 아주 빈약한 보호막마저도 없는 이 소녀의 곧 닥칠 불행에 마음이 쓰인다. 급기야 부모를 등지고 이 소녀에게 같이 개성으로 가자고 말한다. 소년의 이러한 제안은 소설과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랑의 도피행이 아니었다. 천주교 탄압으로 순교한 조상을 둔 천주교도 집안의 자식으로서 듣고 가슴에 새기고 선망하던 종교적 열정과 의협심 때문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열정을 잃었고 소녀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졌으며 가부장제 사회의 남자답게 무심하고 차가운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었다.

가난과 전쟁 같은 당대의 엄혹한 환경을 몇 천 배나 더 쓰라리게 만든 건 이렇듯 무정한 남편과 백정의 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이내 친절을 철회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이웃들이었다. 도무지 봄날이라곤 올 것 같지 않은 꽁꽁 언 인생의 한겨울을 지나올 수 있었던 건 아직 세상에서 완전히 고갈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녀들이 걸어 간 길은 온통 밤이었지만 그 길을 밝힌 건 따뜻한 사람의 마음이었다.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는 ‘귀애해주고, 애지중지하는 마음’(116쪽). 같은 처지에 있는 약한 자들의 위로였다. 그 마음으로 그 밤은 『밝은 밤』이 된다.

<책 속 문장 음미하기>

“새비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겨울에 빨래를 하고 있으면 손이 시리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장을 봐오면 다녀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사람. 예전처럼 자기 마음을 살피는 새비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니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257쪽)

“새비 아주머니는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불 위에 누워서 증조모가 말을 하면 눈짓으로 반응했다.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 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때 자신이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간절히 부르던 사람이 바로 새비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증조모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해했다. 너레 내 목소리를 들어주었더랬지. 내가 한 음식을 먹고 맛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어. 너는 내를 삼천이라고 불러주었어. 새비 너는 내를 삼천이라 불러줬었어.”(288쪽) ​

세상이 아무리 깊고 어둔 밤일지라도 꺼지지 않는 빛은 또 작중 화자의 할머니이자 삼천댁의 딸인 영옥의 시린 마음을 비췄다. 작고 어린 아이 영옥을 향한 어른들의 진지하고 정성스럽고 따뜻한 마음. 그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책 속 문장 음미하기>

“하루는 학교에서 백정의 딸이라는 놀림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할머니는 길모퉁이에서 울다가 새비 아저씨를 만났다. 당황해서 눈물을 닦는데 아저씨가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아저씨는 할머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할머니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귀엽고 소중했는지, 할머니의 엄마가 얼마나 용기 있고 사람이 많은 사람인지 이야기해주었다. 예전에는 부모가 누구인지에 따라 귀한지 천한지를 갈랐다고 아저씨는 말했다. 그러다 일본들이 조선에 들어온 뒤 조선인들은 양반이고 상민이고 간에 그저 천한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기런 걸 좋아한단다. 아저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영옥이는 씩씩하고 밥도 잘 먹고, 크게 웃고 공도 잘 차고 달리기도 잘하지. 희자랑도 친하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아재빈 키가 크구 목도 길구, 항상 웃구 밥도 잘 자시구. -듣기 좋구나. -끝이 아니라요. 아재비랑 있으면 우리 어마이랑 아바이랑 모두 웃구, 새비 아즈마이두 웃구, 희자도 웃구. 아재비가 오기 전이랑 달라요. 아재비는 해 같은 사람이라요. 낭중에두 해를 보믄 아재비가 생각날 것 같아요.

-말하는 거 보라우. 영옥이는 낭중에 시인을 해야갔어.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동안 할머니는 학교에서 겪었던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안심이 됐다. 증조부는 할머니가 크게 웃거나 공을 차면 화를 냈지만 새비 아저씨는 그걸 좋게 봐주었다. 새비 아저씨는 일하는 식료품점에서 종종 주전부리를 가져와서 몰래 먹으라고 주기도 했고 할머니가 우스운 얘기를 하면 재미있다고, 더 해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 새비 아저씨 곁에 있는 새비 아주머니의 얼굴에도 어느새 살이 오르고 웃음이 어렸다.”(111쪽)

-우리 대견한 영옥이. 아가 아처럼 울지도 않구, 마음 다 감추고 사느라 얼마나 서럽구 외로웠어. 아즈마이가 다 안다. 아즈마이한테는 영옥이가 딸이나 진배없다이. 오늘은 마음껏 울고 훌훌 털어버리라우....(115쪽)

명숙 할머니가 보내오는 편지에도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220쪽) ​

작중 화자인 지연은 증조 할머니와 할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는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걸”(337쪽)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밝은 밤을 걸어간 그녀들의 처연한 삶과 연결된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지나간 시간 속의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무엇보다 상처받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위로하라고.

『밝은 밤』을 읽을 수 있어 행복했다. 작가들은 도대체 무엇에 씌어 이런 글을 쓸까. 플라톤의 대화편 『이온』에 시인이란 자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신에 사로잡혀 쓴다는 구절이 나온다. 조롱의 의미로 하는 말인데, 이 말 이상의 찬사가 있을까. ‘신에 사로잡혀 쓴 글’ 그 이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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